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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시사

중세 유럽의 유대인과 다른 소수 민족의 사회적 지위

by 토부 2024. 9. 19.

중세 유럽, 유대인과 소수 민족들의 삶은 어땠을까요? 차별과 박해 속에서도 그들만의 문화를 지켜낸 이야기. 종교, 경제, 그리고 정치가 얽힌 복잡한 관계 속 그들의 생존 전략을 들여다봅니다.

유대인 공동체의 형성과 발전

디아스포라와 유럽 정착

유대인들이 유럽에 정착하게 된 건 로마 제국 시대부터예요.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흩어졌죠. 이걸 '디아스포라'라고 해요. 처음에는 주로 지중해 연안에 살았는데, 점차 유럽 내륙으로 퍼져나갔어요.

재미있는 건, 유대인들이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했다는 거예요.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면서도 현지 문화를 받아들였죠. 예를 들어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아랍어를 썼고, 독일의 유대인들은 독일어를 바탕으로 한 '이디시어'를 만들었어요. 이렇게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의 문화를 지키면서도 유럽 사회의 일부가 되어갔답니다.

게토의 형성과 생활

중세 후반부터 많은 도시에서 유대인들을 특정 구역에 모아 살게 했어요. 이걸 '게토'라고 하죠. 처음에는 유대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이었는데, 나중에는 그들을 통제하는 수단이 됐어요. 게토는 보통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밤에는 문을 잠갔대요.

게토 생활이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유대인들은 그 안에서 나름의 삶을 만들어갔어요. 회당을 중심으로 종교 생활을 했고, 자체적인 학교도 운영했죠. 심지어 자치 정부 같은 것도 있었대요. 물론 외부와의 교류가 제한되다 보니 문화적으로 고립되는 면도 있었어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환경이 유대인들의 정체성과 전통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죠.

종교와 문화의 보존

유대인들에게 종교는 정말 중요했어요. 성경(토라)과 탈무드를 중심으로 한 종교 교육이 공동체의 핵심이었죠. 랍비들은 단순히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공동체의 리더 역할을 했어요. 그들이 내린 결정은 법적인 효력도 있었대요.

문화적으로도 유대인들은 독특한 전통을 지켜냈어요. 예를 들어 '카발라'라는 신비주의 전통이 발달했죠. 또 히브리어로 된 시나 철학 작품들도 많이 썼어요. 재미있는 건 이런 유대 문화가 주변 기독교 문화에도 영향을 줬다는 거예요. 특히 성경 해석 방법 같은 건 기독교 학자들도 많이 참고했대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차별 속에서도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거죠.

경제 활동과 사회적 역할

금융업과 고리대금업

중세 유대인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금융업이에요. 특히 고리대금업으로 유명했죠. 사실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어요. 기독교에서는 이자를 받는 걸 금지했거든요. 그래서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했고, 그게 유대인들의 몫이 된 거예요.

하지만 이게 양날의 검이 됐어요.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움을 사는 원인이 됐죠. 특히 경제가 어려워지면 유대인들이 희생양이 되곤 했어요. "유대인들 때문에 우리가 가난하다"는 식의 생각이 퍼졌거든요. 그래서 유대인 박해의 많은 부분이 이런 경제적 이유에서 비롯됐답니다.

의학과 과학 분야의 공헌

유대인들은 의학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어요. 많은 유대인 의사들이 왕실이나 귀족 가문에서 일했죠. 그들은 아랍 의학과 그리스 의학을 잘 알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히브리어로 된 의학서적들도 가지고 있었고요.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유럽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답니다.

과학 분야에서도 유대인들의 활약이 대단했어요. 특히 천문학이나 수학 같은 분야에서요. 예를 들어 '야콥 벤 마키르'라는 사람은 천문 관측 기구를 발명했대요. 이런 과학 지식 덕분에 유대인들은 항해와 지도 제작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콜럼버스의 항해에도 유대인 천문학자와 지도 제작자들이 참여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데도 한몫했던 거죠.

무역과 상업 네트워크

유대인들은 국제 무역에서도 큰 역할을 했어요. 그들만의 독특한 네트워크가 있었거든요. 예를 들어 스페인의 유대인 상인이 독일에 가면 그곳 유대인 공동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죠. 언어도 통하고 서로 신뢰할 수 있으니까 거래하기가 훨씬 수월했어요.

특히 유대인들은 사치품 무역으로 유명했어요. 비단, 향신료, 보석 같은 것들이죠. 이런 물건들은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운송 중에 도둑맞을 위험이 컸어요. 그래서 현금 대신 신용장 같은 걸 사용했는데, 이게 나중에 근대 금융 시스템의 기초가 됐대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무역 활동이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에요.

법적 지위와 차별

왕실의 보호와 특권

중세 초기에 유대인들은 종종 왕의 직접적인 보호를 받았어요. 이건 일종의 특권이었죠. 왕의 보호를 받으면 다른 사람들의 괴롭힘을 덜 받을 수 있었거든요. 게다가 세금도 직접 왕에게 냈기 때문에 지방 영주들의 간섭을 덜 받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이런 '특권'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었어요. 왕의 기분에 따라 유대인들의 운명이 좌우됐거든요. 돈이 필요하면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세금을 물렸고, 정치적으로 필요하면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기도 했죠. 예를 들어 영국의 에드워드 1세는 1290년에 모든 유대인을 추방했는데, 이건 자기 인기를 올리기 위한 조치였대요. 그러니까 왕의 '보호'는 양날의 검 같은 거였죠.

직업 선택의 제한

유대인들은 직업 선택에 큰 제한을 받았어요. 대부분의 길드가 유대인의 가입을 금지했거든요. 농사를 짓는 것도 어려웠어요. 땅을 소유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금융업이나 중개업 같은 일을 주로 했어요.

이런 제한이 유대인들을 '다르게' 만들었어요. 그들은 주로 도시에 살았고, 교육 수준도 높았죠. 읽고 쓰는 능력이 필수였으니까요. 이런 특징들이 나중에는 오히려 장점이 되기도 했어요. 근대 사회로 넘어갈 때 유대인들이 빨리 적응할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중세 시대에는 이런 '다름'이 차별과 박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답니다.

종교적 차별과 개종 강요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 중 가장 심각한 건 종교적인 거였어요. 기독교 사회에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이라는 오명을 썼죠. 이런 인식 때문에 많은 차별과 박해가 있었어요. 특히 십자군 전쟁 시기에는 유대인 학살도 여러 번 있었대요.

교회에서는 종종 유대인들에게 개종을 강요했어요. 개종하면 모든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죠. 실제로 개종한 유대인들 중에는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끝까지 자기 신앙을 지켰답니다. 그들에게 유대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정체성 그 자체였거든요. 이런 굳은 신념이 유대인들이 온갖 차별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이 됐던 것 같아요.

다른 소수 민족의 상황

무어인과 이슬람 문화

스페인에는 무어인들이 있었어요. 이들은 북아프리카에서 온 이슬람교도들이었죠.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스페인 남부를 지배했는데, 그 시기에 굉장히 발달된 문화를 만들어냈어요. 특히 과학과 철학 분야에서 뛰어났죠.

무어인들의 문화는 유럽에 큰 영향을 줬어요. 그들이 가져온 아랍 숫자나 대수학 같은 것들이 유럽 과학 발전의 기초가 됐죠. 또 그들의 건축 양식이나 음악, 시 같은 것들도 유럽 문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어요. 하지만 15세기 말 기독교도들이 스페인을 통일하면서 무어인들은 추방되거나 개종을 강요받았답니다. 그래도 그들이 남긴 문화적 유산은 지금까지도 스페인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집시와 유랑 생활

집시들도 중세 유럽의 중요한 소수 민족이었어요. 그들은 인도에서 왔다고 하는데, 정확한 기원은 아직도 불분명해요. 유럽에는 14세기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죠. 집시들은 주로 유랑 생활을 했어요. 마을에서 마을로 옮겨 다니며 음악을 연주하고 점을 치고 간단한 수리 일을 하면서 살았죠.

집시들은 항상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어요.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그들의 생활 방식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많은 차별과 박해를 받았죠. 어떤 나라에서는 아예 추방령을 내리기도 했어요. 하지만 집시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들만의 문화와 언어를 지켜냈어요. 오히려 그들의 음악이나 춤은 유럽 문화의 한 부분이 되기도 했죠. 특히 스페인의 플라멩코 같은 건 집시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대요. 그러니까 차별 받으면서도 문화적으로는 큰 기여를 한 셈이에요.

이방인과 외국인 상인

중세 유럽에는 '이방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주로 다른 나라에서 온 상인들이었죠. 예를 들어 이탈리아 상인들이 영국에 가서 장사를 한다든가 하는 식이었어요. 이들은 보통 특별한 지위를 가졌어요. 왕의 보호를 받으면서 무역을 할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이방인들의 삶이 항상 편했던 건 아니에요. 전쟁이 나거나 경제가 어려워지면 제일 먼저 공격받는 대상이 됐죠. "외국인들 때문에 우리가 손해 본다"는 식의 생각이 퍼지곤 했거든요. 그래도 이런 이방인들 덕분에 유럽 각국 사이의 교류가 활발해졌어요. 그들이 단순히 물건만 옮긴 게 아니라 새로운 기술이나 아이디어도 함께 가져왔거든요. 그러니까 중세 유럽의 발전에 이방인들의 역할도 컸던 셈이에요.

박해와 추방의 역사

십자군 시대의 유대인 학살

십자군 전쟁은 유대인들에게 큰 비극이었어요. 특히 제1차 십자군 때 일어난 일들이 정말 끔찍했죠. 1096년,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유럽 곳곳의 유대인 마을을 습격했어요. "이교도를 무찌르러 가는 길에 그리스도의 원수인 유대인들을 먼저 처단하자"는 식의 생각이었대요.

라인강 유역의 유대인 공동체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어요. 마인츠, 보름스, 쾰른 같은 도시들에서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살해됐죠. 많은 유대인들이 강제로 세례를 받아야 했고, 어떤 이들은 자살을 선택하기도 했어요. 이런 일들이 있고 나서 유대인들에 대한 인식이 더 나빠졌어요. "유대인들은 기독교의 적"이라는 생각이 더 강해진 거죠. 그래서 십자군 전쟁 이후로 유대인들의 삶이 더 힘들어졌답니다.

흑사병과 유대인 박해

14세기 중반,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은 유대인들에게 또 다른 비극이었어요. 당시 사람들은 흑사병의 원인을 몰랐거든요. 그러다 보니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고 싶어 했죠. 그 대상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어요.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이 퍼졌대요.

이 소문 때문에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 학살이 일어났어요. 특히 독일 지역이 심했죠. 많은 도시에서 유대인 공동체가 완전히 사라졌어요. 재미있는 건, 교황이 "유대인들은 흑사병과 관계없다"고 선언했다는 거예요. 하지만 소용없었죠. 사람들의 분노와 두려움을 누구에게든 쏟아내고 싶어 했으니까요. 이 사건 이후로 많은 유대인들이 동유럽으로 이주했어요. 그래서 폴란드나 리투아니아 같은 곳에 큰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됐답니다.

스페인에서의 추방령

1492년은 유대인 역사에서 정말 중요한 해예요. 이 해에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난도 왕이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거든요. 당시 스페인에는 약 20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개종하든지 아니면 나라를 떠나라"고 명령한 거예요.

이 결정의 배경에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정치적인 계산도 있었어요. 스페인을 하나로 통일하기 위해서는 종교도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많은 유대인들이 추방되었고, 일부는 개종을 선택했어요. 하지만 개종한 사람들도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죠. "겉으로만 기독교인인 척하는 거 아니냐"는 식으로요.

이 사건은 스페인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유능한 상인들과 학자들이 한꺼번에 나라를 떠났으니까요. 반면 추방된 유대인들은 다른 나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어요. 특히 오스만 제국이 그들을 환영했대요. 그래서 이스탄불이나 살로니카 같은 도시에 큰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됐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죠. 한 나라의 손실이 다른 나라의 이득이 된 셈이니까요.

자주 묻는 질문 (FAQs)

중세 시대에 유대인들은 모두 부자였나요?

그렇지 않아요. 일부 유대인들이 금융업으로 부자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평범한 삶을 살았어요. 오히려 많은 유대인들이 가난에 시달렸죠. 특히 게토에 갇혀 살 때는 생활이 정말 어려웠대요. 부자 유대인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과장된 면이 있어요.

유대인들은 왜 그렇게 박해를 받았는데도 유럽에 계속 살았나요?

복잡한 이유가 있어요. 첫째, 많은 경우 유대인들이 갈 곳이 없었어요. 다른 나라로 가도 비슷한 상황일 거라고 생각했죠. 둘째, 오랫동안 살아온 곳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곳에 자기들의 역사와 문화가 있었으니까요. 셋째, 박해가 항상 지속된 건 아니에요. 평화로운 시기도 있었고, 그때 형성된 관계들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죠.

중세 시대에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의 결혼은 가능했나요?

공식적으로는 금지됐어요. 교회법에서 이런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거든요. 유대교에서도 이를 금지했고요. 하지만 실제로는 간혹 일어났어요. 그럴 경우 보통 한 쪽이 개종을 해야 했죠. 대부분은 유대인이 기독교로 개종했어요. 하지만 이런 경우는 정말 드물었고, 양쪽 공동체에서 다 배척받는 경우가 많았답니다.